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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방, 그의 책장 한 켠, 손이 닿지 않아 곰팡이가 슨, 그의 연습장을 꺼내든다. 표지를 펼쳤다.
앞장엔, 비록 연습장일 뿐이지만,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짤막하게, 필기체로 적혀있다. 눅눅해 잘 떨어지지 않는 다음 장을 펼쳤다. 아무것도 없다. 연습장은 첫 장을 제외하곤 모조리, 텅 비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백에 문을 그려넣었다. 안과 밖. 내가 있는 곳이 안인지 밖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나는 닫히고 공간은 나뉘었다. 문에 무늬를 그려넣는다. 당초문. 문양을 들여다보다, 문득 정신이 아득해진다. 책장을 덮는다. 문은 닫혀있다. 그는 없었다. 그는 그저 우리 네가족 벽에 걸린 사진 속에서 입을 굳게 다물고 앉아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