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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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1 그, 그리고몽상/현상 2022. 6. 26. 02:00
0- 그는 떠났고 나는 남았다. 그리고 나는 나를 잃었고 내 속에는 그만 남았다. '코끼리를 떠올리지 마'라는 말을 들으면 머릿속이 코끼리로 가득 차는 것처럼. 그가 바란 것들을 해내기 위해서는 먼저 그를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렇게나마, 글로 그를 적어, 내린다. 1- 처음 본 것은 학기 초 교양 시간에서였다. 사진의 이해. 겉옷을 파고드는 바람이 아직 시린 겨울의 끝자락. 열린 문으로 넘나드는 바람에도 나는 굳이 맨 뒷자리, 문 옆에 앉았다. 혼자서. 사람의 눈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나는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치듯 휴학했었다. 그는 맨 앞자리에 친구들과 앉아있었다. 칼같이 계산해 전역과 복학 시기를 맞추었는지, 아직 밤송이 같은 뒤통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무어가 그리 즐거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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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몽상/아쿠이야기 2013. 8. 16. 02:34
1- 아쿠는 하얀 말티즈다. 2- 언제 오게 되었는가.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모르지만) 최초 기록은 2006년 4월 16일. 4월 16일도 조금 지난 뒤의 기록이니 실제 온 것은 더 이전일 터. 3- 어떻게 오게 되었는가. 당시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고 학교 앞 후줄그레한 원룸에서 친구랑 둘이 살고 있었다. 어느날 문득, 정말 문득, 개를 키우자고 했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인지는 모르겠다. 옥션같은 곳을 뒤지다가 친구가 카페를 찾았고 모든 것은 친구가 알아서 했다. 나는 하얀 말티즈를 골랐을 뿐이다. 돈도 3만원인지 5만원인지 몇 푼 안들었다. 개 분양하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고, 아마도 조달청 앞에서 만난 것 같다. 강아지는 커다란 과일상자에 담겨서 왔다. 추운날 그렇게 왔다. 4- 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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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몽상/아쿠이야기 2013. 8. 16. 01:56
1- 우리집 개 아쿠에 관한 이야기 2- 본래 만화로 그리려 했으나 시간도 없거니와 재주도 없고. 설정만 잡아놓고 생각으로 흐지부지 사라질까봐 이렇게 줄글로라도 미리 말문을 열어놓는다. 3- 나는 본디 숫자에 약하다. 두자리 덧셈조차 버벅거리고 중요한 날짜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통장 비밀번호를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한다. 어찌됐건, 아쿠가 언제 왔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래서 이 글도, 앞으로 이어질 글들도 모두 싸이월드 사진첩에 의존해서 쓴다. 4- 글은 사진과 한 묶음이다. 한 묶음은 한 사건으로 묶인 사진들로 구성한다. 중복되는 사진 포함. 총 사진은 100장 내외지만 중복을 합치면 총 글은 15편 내외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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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몽상/거울 도시 2012. 2. 24. 17:07
정수리 위로 두꺼운 구름, 터질 듯 부풀다 한뭉치 눈을 쏟아낸다. 하얀 아침, 눈에 잠긴 길거리로 굴뚝으로서 우두커니 설 사람이 쏟아진다. 짓밟히는 눈. 나도 그에 동참하야 눈을 밟으며 걷는다. 건널목 앞에서 끊었던 담배를 뽑아 문다. 불은 없다. 흐릿하게 떠오르는 얼굴. 입가에 흐릿하게 피는 웃음. 그러다 사람이 울지못해 웃는, 마지못해 웃는 얼굴을 하고선 실성한 사람마냥 히죽거린다. 그러다 맞은편 사람들 사이, 무릎깨에 작은 구름이 조심스럽게 피어오르다. 부모를 놓친 아이일까, 기다리는 아이일까. 오만가지 상상에 혼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때, 차 신호등도 붉게 달아오른다. 무리를 따라 걷는다. 아이도 종종걸음으로 걷는다. 점점 가까와진다. 노란 중앙선을 넘어갔을 무렵, 아이는 서글프게 하얬다. 얼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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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몽상/거울 도시 2012. 2. 24. 17:05
심한 비탈을 내달리는 소년의 심장박동은 언덕을 따라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린다. 입에선 단내와 함께 뽀얀 입김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온다. 숨 가쁘게 뛰어온 아이 앞에는 학교 앞 문방구의 뽑기 통이 가지런하다. 누군가 강제로 속을 내려 했던 것일까. 하나같이 동전 구멍 밑으로 아가리가 휑하다. 돈을 끼워넣고 돌리는 손잡이도 잘 움직이지 않는다. 소년은 숨을 고르며 쭉 늘어서 있는 통 중 하나를 바라본다. 흔한 만화영화 딱지조차 붙어있지 않아 그 속을 알 수 없는, 아니 속이 텅 비어 무엇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그러한 뽑기 상자. 그 통을 유심히 바라보던 소년은 가까이 다가서 무릎을 구부린다. 그러곤 빈 통에 코를 박는다. 하얀 입김이 서려 희뿌연 통. 속이 비었는지 찬 것인지 알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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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몽상/거울 도시 2012. 2. 24. 17:04
어렸을 적, 얼굴에 비누칠을 한 채로 면도를 할 수 있게 되면 어른이 된 것이라 생각했다. 종종 대중욕탕에서 그러한 모습을 한 채로 별의별 행동을 다 하는 어른들을 봐왔기에. 어른이 되고픈 마음에 따라해 보았지만 결과는 '악'하는 외마디 비명뿐이었다. '나홀로 집에'의 케빈이 스킨을 바르며 느낀 어른에로의 성장통.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나 케빈이나 정말 바보였지만, 그 시절엔 어른이 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보고 팠다. 커피포트로 커피를 내려 마시고 면도도, 스킨도, 모두 해보고 싶었다. 허나 결과는 깨진 유리조각과 쓰라려 상기된 뿌연 얼굴 뿐이었다. 지금이야 자주 종종 왕왕, 커피를 마시고, 비누칠을 한 채 눈을 뜨고 면도를 하며, 후엔 스킨을 하지만, 이것으로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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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몽상/거울 도시 2012. 2. 24. 17:04
일을 마치고 나선 길. 순간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벌써 겨울이구나.' 평소같으면 술에 취한 사람들로 요란스러워야 할 거리가 텅 비었다 날이 급작스레 차가워진 탓일까. 마치 8년전 눈내린 겨울의 서울 밤거리인 것만 같다. 머리가 크고 처음으로 가본 서울은 흑백의 도시였다. 백색광을 발하는 중세 고딕양식의 가로등, 그 아래 끊임 없이 발광하는 눈과 늦은시간의 텅빈 도로를 미친듯이 질주하는 검은 형체들. 하늘을 뒤덮은 회백의 구름과 건물의 어두운 그림자. 유동유색의 빛이라고는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사내의 담배불 뿐인 그 도시의 빛깔. 그 도시의 차가움. 그 도시의 낯설음. 그것이 그날 그대로 내게 남아 오늘의 도시를 뒤덮은 것만 같다. 늘상 그렇듯 처를 정해두지않고 걷는 중에 익숙치 않은 골목이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