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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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몽상/동강 2012. 2. 24. 16:51
나는 그 문 뒤에 그가 있기를 바랐다. 비단 문 뒤 뿐만 아니라 강가에도, 학교에도. 사실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에도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저 바람이 바뀌었음을 인지 할 뿐. 비는 무엇인가. 당신은 불고 나는 시간에 젖는다. 그저 삶은 아라베스크 문양처럼, 당초문처럼, 꿈틀거리는 동강처럼, 어지럽게 얽힐 뿐 끝을 알 수 없다. 언젠가는 나도 담배연기처럼 사그라 들텐데, 비에 젖을텐데, 눅눅해진 공책처럼 잔뜩 어그러질 터인데. 나는 그로 가장한 나를 찾아다녔고 나는 나로만 가득차 길을 잃었다. 이번 여행은 실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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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몽상/동강 2012. 2. 24. 16:49
비가 왔다. 하얀 운동장에 점점이 자욱이 난다. 몰고 온 차에 올라탔다. 시트가 빗물인지 빈 수조의 상한 물인지, 젖었다. 차창에 비가 흘렀다. 차 앞 유리로 비는 거칠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와이퍼로 빗줄기를 털어냈다. 아니, 털어내려 했다. 끝없이 쏟아지는 비는 계속해서, 낮게 누운 유리 위로 어지러이 아라베스크 문양을 그렸다. 어지러운 눈을 감고 담배를 꺼냈다. 불이 붙고, 담배연기는 꼭 창밖의 무늬를 그렸다. 혀가 따끔거렸다. 속이 매스꺼웠다. 그대로 차를 몰아 강가엘 갔다. 동강은 살은 듯 꿈틀거렸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움찔. 연습장. 문을 열었다. 어둔 동강에 담뱃불이 빨갛게 찍혀 타들어갔다. 나로 가득차 있었다. 한장을 찢어 차 밖으로 내던졌다. 강물에 나는 떠내려가고 차 헤드램프에서 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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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몽상/동강 2012. 2. 24. 16:49
영월엘 갔다. 이제는 유명해져 길을 찾기 수월해진 한반도지형에를 갔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 넷은 사진을 찍었고 그 전에는 낚시를 했다. 시멘트 공장이 주홍빛으로 우는 밤, 동강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 흔한 모기 한마리 없었다. 밤낚시때에 아버진 담배를 물지 않았다. 그저 강에 찌를 띄울 뿐 이었다. 저 물 속엔 아무것도 없었다. 붕어도 잉어도 없었다. 다만 빠가사리만 남아 물을 지켰다. 동강의 밤엔 공장이 떠는 소리와 빠가사리 우는 소리만 진동했다. 간간이 풍덩 떡밥 흩어지는 소리만 섞였다. 나도 담배대신 낚시만 들고 앉아, 바늘에 걸린 가여운 수생동물처럼 외톨이로 우는 소리를 내었다. 동강의 밤은 길었다. 다음 날 영월의 한 초등학교에 갔다. 폐교인지 방학인지 학교는 비었다. 오래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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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몽상/동강 2012. 2. 24. 16:48
그의 방, 그의 책장 한 켠, 손이 닿지 않아 곰팡이가 슨, 그의 연습장을 꺼내든다. 표지를 펼쳤다. 앞장엔, 비록 연습장일 뿐이지만,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짤막하게, 필기체로 적혀있다. 눅눅해 잘 떨어지지 않는 다음 장을 펼쳤다. 아무것도 없다. 연습장은 첫 장을 제외하곤 모조리, 텅 비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백에 문을 그려넣었다. 안과 밖. 내가 있는 곳이 안인지 밖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나는 닫히고 공간은 나뉘었다. 문에 무늬를 그려넣는다. 당초문. 문양을 들여다보다, 문득 정신이 아득해진다. 책장을 덮는다. 문은 닫혀있다. 그는 없었다. 그는 그저 우리 네가족 벽에 걸린 사진 속에서 입을 굳게 다물고 앉아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