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긴 글
책상
opener_
2012. 2. 24. 16:34
다급히 울리는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잇달아 시작되는 웅성거림. 토요일 마지막 4교시 수업. 누구나가 집을 바라기에, 혹은 나름대로의 자유를 바라기에 교실이 고요 하려야 고요 할 수가 없다. 탁탁. 장난을 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수업에 집중하기 위해서 인지는 모르지만, 누군가의 일종의 연출로 인해 소란스러운 교실은 이윽고 고요해졌다. 모두가 소리의 근원을 찾으려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이는 동안, 그는 다시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 넓은 책상 위 어느 곳에 이 빨간 볼펜을 놓아야 하는가. 책상의 오른쪽? 오른쪽 위에는 이미 파란스티커가 붙은 화이트가 놓여져 있다. 그 것의 위치를 정하는데 한시간이 들었다. 그리 쉽게 바꿀 수는 없지. 그럼 그 아래 귀퉁이? 아니야. 책이 그쪽으로 쏠린단 말이야. 이걸 놓으려고 그 큰 책을 밀어낼 순 없지. 그렇다고 거기에 두었다간 책에 밀려 떨어지고 말겠지? 거기다 이 책이란 놈은 앙심을 품고 내 손을 그으려 들지도 몰라. 그럼. 책 위는 어떨까? 아니 것도 아니다. 귀퉁이에 그냥 두나 책 위에 올리나 떨어지는 건 매한가지지. 그럼. 역시 왼쪽에 두는 수밖에 없군. 왼쪽 아래 모서리에 놓으면... 아 여긴 팔꿈치가 있으니까 안되겠다. 빨갛게 팔에 묻어 날것 아니야? 불 보듯 뻔하지. 이놈은 옳아! 하고 네가 날 그리 뱅뱅 돌려댔겠다?! 너도 한번 당해봐라, 하면서 일말의 가책 없이 내 희디흰 팔에 빨간 길은 내겠지. 그럼 난 그걸 피로 알고 현기증이나 쓰러질 지도 몰라. 정해진 거구만. 왼쪽 위구나. 어디 보자. 지금까지 뭐뭐했지? 왼쪽 위에 빨간 볼펜, 오른쪽 위에 화이트, 오른쪽 아래는 비워두고, 중앙위에는 필통. 왼쪽아래는 팔꿈치가 있으니까 비우고. 어? 샤프를 어디다 뒀지? 아 뭐야 왜 왼쪽 귀에 있지? 왼쪽에 꽂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쩝. 손에 계속 들고있어야지 안 그러면 그냥 잊어버리는 군... 음 내가 뭘 하고 있었지? 음.. 음? 왼손에 톰보우를 들고있으니.. 음..
빨간 펜하고 바꿔야 겠군. 그럼 빨간 펜은 어디에 두지? ......
한순간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오른편 벽에 걸린 검은 시계의 시침은 1시를 찔렀다. 4교시를 마치는 종소리. 교실을 가득 매웠던 한때의 무리는 순식간에 썰물 빠지듯 교실 뒷문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그는 조용한 점심시간을 틈타 작업을 마저 끝내려는 듯 다시 책상에 온몸의 감각을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