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장
폐허
opener_
2014. 3. 25. 23:53
1-
너는 내게 폐허다. 한없는 약점이며 다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는 짙은 어둠이다.
2-
너를 향했던 내 행동은 타인의 눈에 나 자신의 족쇄가 되어, 네게서 거둔 뒤에도(혹은 내쳐진 뒤에도) 나는 다른 곳으로 손을 뻗을 수가 없다.
3-
둘로 어렴풋이 잘 지내기를 바랐지만 결국 너는 다시 하나가 되었고, 나는 더욱 비참해졌다. 두 사람의 연이라는 것이 본디 끊어질 수도,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나, 나는 전자가 내가 아님으로 거짓위안하며 네게 후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4-
세상이 너무나도 밝아져서 이전 같으면 음지에서 보이지 않았을 것들이 다 눈에 들어온다. 내 폐허의 얼굴과 내 폐허의 심경과. 화면 속에서 눈길이 스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5-
나는 네게 나도 내게 알리고,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부도나 멈춰선 건축부지처럼, 영영 폐허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다. 너는 애초에 깨끗이 밀었을 터이나 나는, 아무리 주위에 석회로 벽을 쌓아도 가려지지 않는 폐허를 가지게 되었다.